호릭일상/끄적끄적
이별 - 퍼옴
호릭
2012. 2. 5. 01:01
1.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 그런 장면이 있다. 김선아를 찾아간 옛 연인 려원은 현빈과 자기는 오랜 시간 함께해 왔다며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때 김선아가 던진 한마디는 이렇다. "추억은 아무런 힘이 없어요. 추억은 추억일 뿐이에요."
2. 한때 나는 추억은 힘이 없지만 때론 힘이 되기도 한다고 생각했다. 어리석었다. 추억을 곱씹는 일은 헛배만 부르게 할 뿐이다. 추억은 힘이 되지 못하고 그리되어서도 아니 된다. 떠나간 사람과 남겨진 사람, 다가올 사람 모두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3. A는 평소 남자친구가 열광하던 노래와 연예인이 전 여자 친구와 관련돼 있었단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이별했다. "과거가 있는 건 상관없어. 과거와 현재, 그 중간 즈음에서 갈팡대는 그 애의 미련을 봐서 슬퍼진 거야. 그래서 망설임 없이 돌아선 거야."
4. 그 사람이 처음으로 화를 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이별을 하고 난 뒤였다. 잊을 만하면 눈에 보이고 시작할 만하면 귀에 들려 새로이 시작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땐 그의 의지 문제라 생각했는데 뒤늦게 알았다. 바람이 그에게 싣고 가도록 추억을 여기저기 흩뿌려 놨던 내가 나쁜 아이였단 걸.
5. 이미 끝나 버린 관계에서도 상호 간의 의무는 존재한다. 서로를 잊어야 할 의무. 상대가 그리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할 의무. 그 누구도 추억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완전히 묻어 버러야 할 의무. 마지막으로 그러한 의무들이 있었음조차 깨끗이 잊어 버려야 할 의무.
6. 삼 년을 청춘 바쳐 기다리고 오는 사람 밀어내며 버텼었다. 고독이고 욕정이고 낙원에 닿을 꿈 하나로 견딘 채 달렸으나 결국은 황폐지였다.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꽃도 나무도 새도 그 사람도 모두 내 마음이 빚은 환상이었음을. 모든 건 과거와 현재를 구분 못한 내 탓이었음을.
7. 새 사람이 다가왔다. 남겨진 발자욱 없애려고 무던히도 애쓰며 보냈던 긴긴밤이 얼마나 무상했는가를 보란듯이 참 쉽고 빠르게 들어왔다. 옛 사람 발자욱을 짓이길 수 있는 건 나 자신도 긴 시간도 아녔다. 문을 두드리던 새 사람 발자욱 덧대져야 비로소 흔적 없이 스러지는 거였다.
8. 추억은 밤하늘의 별처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관망할 때 가장 빛이 난다. 내 삶을 데우는 근원은 저 멀리 비추는 아른한 별빛이 아니라 함께 감상하며 두 손 맞잡은 이의 온기다. 그래. 드라마가 현실이었다. 추억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추억은 정말로 추억일 뿐이었다.